내가 서울에 처음 왔을 때 인상적인 것들 중 하나는 어느 동네에서도 경험할 수 있는 풍부한 독립 책방 문화였다. 미국 도시들에는 뉴욕의 더 스트랜드나 포틀랜드의 파월즈처럼 아주 좋은 서점들이 있긴 하지만 그 것들은 엄밀히 말하자면 책방이 아니라 대규모 가게들이다. 내가 다니는 서울 책방들의 기능은 책을 파는 것 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공간을 열기도 한다. 집에서 가장 가까운 그러한 문화적인 공간을 대표하는 책방은 퇴근길 책 한잔이고 그 책방의 주인인 김종현은 최근에 자기 책방을 열고 운영한 지난 몇년의 경험을 토대로 <한번 까불어 보겠습니다>라는 책을 썼다.
나는 김종현의 책을 읽기 전까지는 까불다라는 단어를 들은 적이 없었다. 지금 그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대충 알고 있긴 하지만 어감이 얼마나 긍정적인지 얼마나 부정적인지 명확히 느끼지 못 한다. 어떻게 보면 까분다는 것은 규칙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하는 것을 의미하고 김종현의 견해에서 보면 퇴사하고 책방을 시작한 것이 까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. 적어도 성공에 강박 관념을 가지는 한국 사회의 기준으로 본다면 그러한 방식은 까부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. 그러나 한국보다 훨씬 자유롭고 여유로운 나라로 잘 알려져 있는 미국에서도 직장을 그만두고 자기 책방을 열 의지가 있는 사람은 그리 찾기 쉽지 않다.
몇 년 전부터 살아 온 동네에 어느 조용한 골목길에서 퇴근길 책 한잔을 우연히 처음 만난 이후 나는 자주 그 책방을 방문해 왔다. 원래 나를 유혹한 것은 책방의 문에 붙혀진 내가 제일 좋아하는 한국 영화 감독인 홍상수의 <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>라는 영화의 포스터였다. 나는 김종현도 홍상수의 광팬인 것을 곧 알게 되었고 그때 이후 홍상수 뿐만 아니라 주인이 선택해서 상영하는 여러 다른 영화들을 보러 책방에 간 적이 많았다. 나는 원래 영화 자체에 대한 관심이 엄청 많지만 진짜 즐기는 것은 퇴근길 책 한잔에서 보는 영화보다 상영한 후에 다른 단골들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.
책방에서 영화를 본 후 술을 마시면서 하는 그러한 대화는 영화 주제로부터 시작되지만 우리가 얘기하면 얘기할수록 자연스럽게 인생에 대한 대화로 전향된다. 나는 그러한 대화에서 주로 할 말도 별로 생각나지 않고 쉽게 표현할 수 있는 말이 많이 없지만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는 것을 참 좋아한다. 나는 그러한 대화에서 나오는 되풀이되는 주제들을 <한번 까불어 보겠습니다>를 읽으면서도 다시 한번 인식했다. 표면상으로 책방인 퇴근길 책한잔의 이야기를 하는 그 책은 실제로는 김종현의 인생관을 풀어 놓고 그 인생관은 내가 진심으로 동의하는 것이다.
나와 김종현이 세상을 똑같게 바라보는 예를 하나 들면 김종현이 어떤 장에서 설명하는 51대49의 게임이 있다. 이 게임은 인생에서 어렵고 중요한 모든 선택은 가치가 아주 비슷한 대안들을 제시하는 것이고 어떤 면에서 선택의 연속인 인생 자체를 51대49의 게임으로 여길 수도 있다. 다른 장에서는 김종현이 죽음에 대해 매 순간 생각한다고 쓰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하려교 노력한다. 특히 죽음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김종현처럼 삶을 더 강렬하게 집중하며 살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. 삶이 끝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정말로 살면서 꼭 해야 할 일을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무엇인지도 알 수 없다.
다른 사람들은 다를 수도 있지만 나는 죽음을 떠올릴 때 살아 있음을 더 뼈저리게 느낀다. 그러나 내가 일상에서 느끼는 살아 있음에 대한 감정과 죽음의 생각을 포함하여 다른 여러 가지가 있다. 퇴사하고 독립 책방을 시작한 김종현보다도 미국을 떠난 미국인인 내가 까부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김종현에게는 책방을 운영하는 것이 직장 생활하는 것보다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것 같고 이와 더불어 나는 미국보다 한국에서 살아 있음을 그 어느 때보다도 매 순간 느낀다. 한국이라는 커다란 장소 안에 포함된 퇴근길 책 한잔에서 술을 마시면서 인생에 대해 토론하며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은 내가 예전에 전혀 느껴보지 못한 감동이다. <한번 까불어 보겠습니다>를 읽고 나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들 중 하나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<고대의 아폴로 토르소>의 유명한 마지막 줄이 문득 떠올랐다: “그대는 그대의 삶을 바꿔야만 한다.”